1.
문제는 간단했다 : 잘 곳이 없다.
집에 언제가냐는 질문에 호기롭게 "이미 틀렸어요"라고 대답할때 까지는 분명 아무런 걱정... 아니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기차 끊기면, 친구 집 가면 되고, 그거 안 되면, 찜질방 가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부대(...)가면 되고, 어쨌든 잘 곳 하난 있는거고"라는, 아름다울 정도로 나이브한 마음가짐 하나로 12시까지 버틴건 좋았는데, 옆의 사람들 걱정시키지 않는답시고 "친구 집에서 자기로 했어요^^" 라고 말하고 나온건 좋았는데.
뭐 사실 나도 알고는 있었지만,
일은 항상 생각대로는 돌아가지 않기 마련이다.
2.
서울에서 집도 절도 돈도 없는 인간이 밤을 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상식적으로 두가지가 있다. 철야, 또는 노숙. 물론 철야라는 옵션은 밤을 나눌 친구가 있고 들어 앉을 만한 공간이 있는 사람이나 선택할 수 있는 호화로운 옵션이니 그런걸 선택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애초에 진지하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노숙인데, 아무리 신세가 처량할지언정 기왕 노숙을 하는 바에야 아무래도 치안도 좋고 인간적 존엄도 지킬 수 있는 곳에서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런 말도 안되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지금 서울에 어디있는가? 상식적으로 시청 앞 광장, 그 곳 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저윽이 당당한 얼굴로 신촌 차도 한복판에 널부러져 있는 미성년자들을 보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가자, 촛불 여관으로.
3.
나는 철판 대신 개기름을 얼굴에 깔고 천막에 놓여있는 신문지 한 뭉치를 집어들었다. 집회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은박 매트들은 벌써 부지런한 숙박객(?)들에 의해 지배당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섬처럼 돋아나 있는 잔디밭에 신문지 한겹을 내려까는 정도가 내게 허락된 사치의 전부였다. 그야말로 삼경이 지난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칼라TV에서는 노회찬 심상정 대표 간담회가, 방송차에서는 각종 공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자기엔 좋지 않은 환경이야, 라고 저녁까지 찌라시 뿌리던 사람답지 않게 투덜거리며 잔디밭 위에 시체처럼 드러누웠지만, 남의 말 듣기 좋아하는 심성덕택에 쉽게 잠을 이루지는 못했다. 글쎄, 이게 뭐냐고요 우리 젊었을 시절엔 데모하면서 이렇게 드러누워 잔다는게 말이나 됐냐는 거지요(여기서 조금 찔림) 뭐, 이게 다 시대가 변한게 아니겠습니까. 새 시대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거지요. 실제로 대책위 대책위 하지만 우리 보기에야 기껏 문화부나 문선대 수준밖에 안되지 않습니까. 예 물론 그거야 그렇지요. 그냥 옛날에 하던 생각하면 너무 약하다 그거에요. 그거야 뭐, 여기있는 사람들이 전부 맑스레닌주의에서 나오던 직업혁명가는 아니잖아요. 예, 이 정도면 기껏해야 애국시민정도긴 하지요. 그렇게 나지막히 지나가는 이야기들을 심상히 흘려넘기며, 몹시 불편한 자세로 나는 잠이 들었다.
4.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넓은 의미에서 노숙이란 단순히 잠자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숙식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생각해볼때, 촛불 여관은 분명 6성, 아니 7성급의 야영지인 것이 분명했다. Jay Kim이 만든 다큐멘터리 상영회 덕택에 선잠에서 깨어난 내가 새벽 04시부터 06시까지 무료로 제공받은, 또는 제공하는 것을 목격한 음식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라면, 컵라면, 시루떡, 커피, 녹차, 얼음물, 바나나, 어린쥐가 아닌 오렌지(1/2개). 전부 횟수에는 제한이 없었다. 차를 제외한 후식류는 매일 바뀐다고 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것저것 집어먹고 나니, 거의 무슨 일본 비지니스 호텔급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안티 2MB 카페 부대표를 연행하겠다고 찾아온 경찰덕택에 벌어졌던 촌극은 식후 엔터테인먼트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론리 플래닛이었다면 분명 월드 베스트 캠핑지에 선정했을만한 장소네. 덕택에, MB에게 하나쯤은 순수하게 고마워 할 만한 일이 생겼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잠자리는 MB가 제공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고마워 MB. 숙박료는 엽서로 보낼께.
5.
그렇게 하룻밤을 어이없이 넘기고 서울역으로 향하면서, 잠을 못자 멍한 머리로 오늘의 후기는 조금 핀트가 빗나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시위를 즐기는 방법에는 러브레터 쓰기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거니까. 조금은 궁상맞고 더러는 어이없는 방법으로도, 하룻밤의 시위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후세가 보기에도 약간은 유쾌한 사실이 아닐까나? 이제는 MB에게 얻어맞은 물대포의 감촉을 떠올리지 않고도, 차분하게 뭔가를 써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난 서울역에 도착하면 세수부터 하기로 다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