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본문만 기록을 정리했습니다.
(토론은 MP3를 참조하세요^-^)
신자유주의 세미나: 성곽 밖의 사람들, 성채 안의 사람들
2008년 3월 26일 신자유주의 비판가로서의 푸코? (서동진)
제가 마냥 대단한 Celebrity인 것처럼 소개해주셔서 황송합니다. 저는 오늘 푸코(Foucault)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조한 선생님 수업에서는 이례적인 형태이거든요. ‘수업에서 이론가를 다루지 않는다’-문화인류학적인 배경 때문에-는 것이 선생님의 방침이셨는데 여러분이 너무나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고 버팀목이 될 이론 하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가지고 있어서 이러한 수업을 기획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푸코(Foucault)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푸코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푸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푸코일텐데요. 방금 제 소개를 하시면서 제일 마지막에 문학동네에서의 글을 한 줄 인용했었는데, 어제 이명박 정권이 <뉴스타트 2008>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말 그대로 이명박 정권의 대통령 선거 즈음해서 내놓았던 여러 가지 실제 공약이 있었는데, 약 500만에 달하는 신용불량자-이 신용불량자라는 말 자체가 굉장히 참신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한 용어이거든요. 그 전에 있었던 빈민이라든가 실업자라는 용어를 대신해서 IMF가 등장하고 난 이후에 저희들이 만들어 냈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패키지 가운데 하나로 신용불량자라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있었어요. 이 신용불량자라는 개념은 신자유주의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인간형인데, 어제 이명박 정권이 국민연금을 담보로 해서 신용불량자들의 채무를 탕감시켜 주도록 하자. 언제부터 그런 이름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금융소외자’-신용불량자라고 하는 명칭이 너무나 모욕적인 표현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명박 정권은 금융소외자들이 그 동안 쭉 납입했었던 국민연금을 담보로 해서 채무를 탕감해주는 방침을 삼겠다고 했습니다. <2008 뉴스타트 정책>이라는 이명박 정권이 가지고 있는 그 기획이 ‘왜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통치 테크놀로지’이냐 이런 이야기를 같이 할텐데요. 그런 것을 염두에 두면서 신자유주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많은 진보적인 사회운동가들이나 사회운동 단체들이 그간의 20여 년간의 민주화를 겪었던 민주화 체제라고, 87년 체제라고 불렀던 변화가 사실상 민주화이기는커녕 우리 삶을 좀 더 피폐하게 하고, 사회적인 빈곤을 심화시키고 양극화를 초래하게 하고 이런 여러 가지 형태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의 문제는 민주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였다는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자, 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신자유주의 정체가 무엇인지 관련해서 여러 가지 갈래가 있을 텐데요.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푸코와 신자유주의를 끌어들이는 이유를 그간 신자유주의를 분석하는 여러가지 갈래를 더듬어 보면서, 푸코가 이야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분석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
첫 번째가 말 그대로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일텐데요. 시장만능주의, 개인주의, 기업가 주의, 이런 여러 가지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신자유주의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가자면 하이예크, 프리드만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학파, 신고전경제학 이런 것들이 현재 경제정책을 비롯한 사회정책이나 국가정책을 위한 이론적인 바탕이 되고 있고 혹은 정책의 가늠자가 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사악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론이다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일리있는 주장입니다. 한국사회에서도 미국에서 신자유주의를 학습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중요한 관료가 되면서 이러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거든요. 대표적으로 김영삼 정권 당시에 있었던 박세일이라는 서울대 교수라든가, 혹은 그 이후에 김대중 정권 당시에 있었던 문용린 교육부 장관, 이런 사람들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국사회가 변하는 과정에서 큰 틀의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기도 한. 문용린 장관의 경우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겠죠. 지난 6-7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한국사회에서의 기본적인 교육의 모델이 있었습니다. 그 교육의 모델이 김영삼 정권에서 마침내 바뀌었고-지금도 진통을 겪고 있죠-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것을 현장 교육에서는 크게 <7차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교육 대개혁>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요. 7차교육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던 유명한 모델이 지금은 더 이상 <학교 사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최근에 많이 듣는 말 중에 ‘학생들이 수업권을 빼앗고 있다. 학습권을 박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겁니다. 피상적으로는 듣기에는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학습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 학생들이 학습할 권리를 박탈하고 있으니까 학습권이라고 쓰겠지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이 때 학습권은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들어왔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이런 것들도 조금 있다가 여러분과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가 모든 것을 시장이라는 언어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고, 이런 형태의 이데올로기, 혹은 독트린 이런 것이 신자유주의가 아닐까? 이럴 경우에는 그 사회를 정치하는 정책, 제도, 관행 이런 것에 스며들고 있는 이념이라든가 혹은 언어라든가 이런 것으로써 신자유주의를 보는 거죠. 그러면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신자유주의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신자유주의를 정의한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경험적인 정치경제적 현실로서의 신자유주의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우리가 겪고 있는 굉장히 positive한 현실을 가르켜 신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죠? 대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들먹이는 것 중의 하나가 공공지출이 축소되고 있다, 사회복지 예산이 삭감된다, 작은 정부다, 시장을 통해 사회 전체를 규율하게 한다, 보다 나아가 신국제질서라는 것을 만들고,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든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짜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가르켜 신자유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데이비드 하비같은 사람이 대표적으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그 책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 분석에서 어떻게 좌절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운데 하나가, 굉장히 예외적인 책일텐데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굉장히 진보적인 지식인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피에르 부르디외가 목숨을 거두기 전에 많은 인류학자들과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신자유주의를 고발하는 굉장히 긴 인류학적인 보고서를 썼습니다. 그 책은 <세계의 비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참담한가 이런 것을 제목으로 삼았었는데요 저는 그 책을 보면서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는 삶의 참담함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지식인의 비루함, 무력함을 바로 그 책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더 나아가야죠.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과 참담함에 대한 공감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죠. 연민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식과 수단을 얻어내려는 노력들이 지난 몇 세기 동안 있어왔는데, 사실 신자유주의 앞에서 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그 비참함을 고발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사회를 새롭게 코드화하려는 기획으로서의 신자유주의
그러면 또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하는 푸코가 신자유주의를 다루려고 하는 접근입니다. 그 사람은 사회를 새롭게 코드화하는 기획으로 신자유주의를 봅니다. 간단히 정리해서 보자면 ‘정치적 합리성으로의 신자유주의’ 이렇게 볼 수 있을텐데요. 여러분에게는 굉장히 낯설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셀 푸코는 대개의 경우 <감시와 처벌>을 쓰고 나서 <성의 역사> 1권을 쓰고, 성의 역사와 관련되어있는 연속적인 3권을 내고 나서, 84년에 예기치 않게 일찍 목숨을 거둔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70년대에 <감시와 처벌>로부터 <성의 역사>로 이어지는 긴 단절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 단절 기간 동안에 미셀 푸코는 참으로 특이하게도 신자유주의에 관련된 세미나를 기획하고 그것을 제자들과 함께 10여 회에 걸쳐 진행했었어요. 그런데 이 세미나에 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이 세미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강의 노트를 외부로 가지고 나오고, 진보적인 지식인 그룹이 미셀 푸코가 세미나에서 다뤘던 주제들을 가지고 토론을 하고 이래서 영국에서는 통치성 학파-제가 정치적 합리성이라고 부르는데-를 구성해서 푸코디언 가운데서는 독특한 그룹이라고 할 수 있겠죠. Economy and Society라고 영국의 유명한 진보적인 사회이론 저널이 있는데, 이 저널이 과거에는 알튀세르인들로 뭉쳐져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학술 저널이었는데, 이 학술 저널이 모두 푸코디안으로 전향하면서 특히 미셀 푸코가 ‘통치성’이라고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진행했던 세미나에 깊은 영향을 받고 모두 다 푸코디안으로 전환을 꾀합니다. 그 때 이후로 사람들은 이를 가르쳐 약간 경멸적인 표현인데요, Governmentality school이라고 부릅니다. 미셀 푸코가 1977-79년에 걸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를 했던 것을 알 거에요. 무작위 군중을 대상으로 해서 강의를 하는 것이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의 주된 특징일텐데, 교수에게 주어진 부담은 일년에 넉 달 동안 강의를 꼭 해야 하고, 강의 할 때마다 새로운 연구주제를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하고 이런 조건이 있었어요. 바로 그러면서 미셀 푸코가 책을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강의록을 남기고, 내가 지금 어떤 주제에 관해서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하고 있다는 기획안을 꼬박꼬박 제출했습니다. 그것이 출판이 가능한 문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유출이 되고, 푸코가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에 관해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푸코가 난데없이 신자유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대처라든가, 레이건의 집권 이후에 말 그대로 당시 ‘신보수주의’라고 불렸을텐데요,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본격적으로 꾀하기 전에 미셀 푸코가 있었는데요, 왜 미셀 푸코가 신자유주의 등장에 관심을 가졌는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어느 유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 이론가 낸시 프레이져가-미국 사회에서 미셀 푸코의 열풍을 가로막으려고 했던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 중의 하나였습니다. <푸코 죽이기> 이런 것을 미국에서 도맡에 했었던 사람인데요, 주장은 간단하죠. ‘푸코식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푸코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에 관한 규범적인 주장을 하나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푸코를 진보적인 사람으로 보기 어렵다고 해서 미국 사회에서 푸코에 관련되어있는 평가를 내리는데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했던 유명한 지식인인데요. 이 낸시 프레이져가 뚱딴지같이 몇해 전에 어떤 좌파 저널에 미셀 푸코와 관련한 반성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미셀 푸코를 잘 못 봤던 것 같다. 그 사람의 이야기인 즉슨, 미셀 푸코에게 전적으로 우호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훈육적 자본주의’로부터 유연하라고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포디즘 안에서 푸코의 작업은 너무나 적절한 것이었고, 정말 우리가 볼 수 있는 포드주의적 자본주의라고 하는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푸코만큼 탁월한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유연화로 상징되는 이 사람의 표현을 빌자면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에 미셀 푸코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푸코의 뜻을 이어서 변화된 자본주의 안에서,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 새로운 분석틀을 개발해야 하지 않겠나. 이것이 낸시 프레이져의 의견이었어요.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낸시 프레이져의 주장과는 달리 푸코는 이미 신자유주의에 관한 분석을 계속하고 있었고,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신자유주의에 관한 분석 가운데서 가장 면밀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푸코의 국가 계보학(Genealogy of the modern state)과 (신)자유주의 세미나
그 이야기를 몇 가지 해보겠습니다. 불행하게도 미셀 푸코가 신자유주의 분석에 몰두했던 3-4년 동안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76년부터 79까지의 시기인데요, 76년에 한국에서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Society must be defended>라는 이름으로 나온 세미나가 있었고요, 그 다음에 <security, territory, population>이라는 이름으로 77년에 있었던 세미나가 있었고, 78년에 <생정치학의 탄생 the Birth of bio-politics>이라는 제목의 세미나가 진행이 되었습니다. 마침 이 모든 세미나가 올해 말까지 완간이 됩니다. 지금 안나온 것이 이 생정치학의 탄생이라는 것만이 나오지 않았고요, 지금 영어로 번역되고 있고요,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간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와있는 부분, 부분의 자투리는 그간 출간이 되어있어서 퍼즐 맞추기를 하면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왔구나 하는 것을 알 수는 있습니다. 이 생정치학의 탄생을 비롯해서 세미나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압축적으로 정리된 내용이 <성의 역사>의 마지막 장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성의 역사> 1권을 읽었을 때 그것은 말 그대로 근대적인 성에 관한 권력과 지배의 관계를 정리한 계보학적 분석으로 읽었지, 그것이 신자유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했었겠죠? 그러나 놀랍게도 그것이 그런 부분을 다루기 위한 저작이었구나 하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게 된거죠. 그러면 이 세미나에서 미셀 푸코가 다루고 싶었던 것은 뭘까? 간단히 보면 제가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미셀 푸코는 말그대로 권력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잇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관심은 미셀 푸코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내놓고 있는 분석도 탐탁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주류 자유주의자들이 내놓는-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모델인데요, 이 두 개의 모델 안에 지배, 권력, 통치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모든 가능성이 그 안으로부터 뽑아져 나옵니다. 미셀 푸코는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그러면서 이 권력을 분석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작업을 진행하는데 그것이 근대 <국가의 계보학>이라고 하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푸코가 70년대에 내내 진행했던 분석 전체의 제목이 될 수 있을텐데요, 그러면서 그가 분석했던 것이 고전적인 그리스 사회부터 70년대 신자유주의 사회까지 분석해보겠다. 그 분석의 일부는 먼저 나오기도 하고, 뒤늦게 나오기도 하고 그랬죠. 고전적인 그리스에 대한 분석은 맨 나중에 푸코 사후에 출간된 성의 역사 2-3권을 통해 알 수 있고 그 이전의 분석들은 다른 방식으로 나오기도 했을텐데요. 그것을 연대기적으로 보자면, 제일 처음에 초기 기독교의 사목권력에 대해 분석합니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에 대한 가정
푸코가 이야기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세가지 기본적인 가정에 대한 비판이 있어요. 권력은 누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머무르고 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지배계급이고, 부르주아일테고, 자유주의자에게는 국가일텐데, 국가는 이렇게 특별한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고 플레이스 홀더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누군가가 소유하고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권력은 통제하거나 속박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은 생산적이다, 권력은 적극적이다, 권력은 능동적이다>는 틀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몇가지의 권력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흔한 가정들을 넘어서고자 하면서 미셀 푸코가 주목했던 것은 초기 기독교의 사목권력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사목권력
사목권력은 나중에 유명한 <인구>라는 개념의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인구라는 개념은 인민 이런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사회에는 각각 자기가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러가지 형태의 시민이라고 하는 사회적 성원으로 만들어져 있는 정치적 공동체이다라고 보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근대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의 모델은 시민임과 동시에 또한 누구인가 하면은 인구에요, 주민이라는 거죠. 이 때 주민은 기독교 초기에 만들어 졌던 목자라는 권력의 모델을 빌려왔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모델은 뭐냐하면 양뗴를 돌보고 있는 목자에요. 양떼들이 오늘 편하게 숨을 쉬고 있는지, 편안히 잠을 자고 있는지, 길을 잃지는 않았는지, 오늘도 먹이를 먹었는지, 돌보는 지도자, 권력의 주체 이런 모델을 가지고 있겠죠. 또한 동시에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성의 역사 마지막 부분에도 나오고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텍스트에도 나오는 부분인데, 우리가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주된 특징이 <죽게 내버려두고, 살게하고> 근대 이전에는 <죽게하고, 살게 내버려둔다>고 하죠? 이게 무슨 말이냐?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과,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 그 이전까지의 권력은 사람들이 구체적인 어떤 살림살이를 하는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경우에는 목숨을 징발하고 이런 방식으로 생사여탈권을 발휘했을 뿐이지,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국가가 발휘해야 할(그 때는 국가는 아니었겠지만) 권력 자체가 다뤄야 할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는 거에요.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결정적인 단절이 일어나는데, 여기서는 생사여탈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죽음에는 관심이 없어요. 이제는 어떻게 살릴 것인가? 제가 드는 흥미로운 예 가운데 하나가, 한국 전쟁이 끝나고 난 직후에 미국에서 경제개발과 관련된- 한 사회가 있으면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모델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는 그것이 없었다고 해요. UN에서도 들어오고 미국 국무부도 들어오는데, 제일 먼저 한국의 경제개발을 위해서 한 것은 인구 센서스를 도입했다는 거에요. 한국에서의 <사회학>이라는 것이 들어온 것이 그 즈음인데요, 서울대에 제일 먼저 생겼는데, 이 때의 사회학은 놀랍게도 <인구학>입니다. 그래서 서울대에 제일 먼저 생긴 연구소가 <인구 및 발전 연구소>입니다. 사회는 뭐냐? 인구와 발전의 관계이다. 국민의 수를 모두 낱낱이 세고, 그들이 나이가 몇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떤 가족 생활을 하는지, 이에 관련되어있는 광범위한 자료를 통해 그들의 건강, 장수, 위생, 안전의 모든 문제를 일일이 챙기는 목자와도 비슷한 모습이죠? 그리고 이 것은 푸코의 압축적인 표현을 빌자면, <사람들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가르켜 <생정치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생정치학의 개념이 겉보기에는 멋있어 보이지만, 살림의 정치학, 삶의 정치학 좋은 말인가 보다. 그건 아니고요, 네그리와 하트가 생정치 개념을 가지고 들어가녀서 <삶정치> 그것은 생태학과 관계가 없어요. 하지만 그런 의욕은 있습니다. Ecology의 사고가.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견딜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최근에 볼 수 있는 것처럼 ‘죽을 권리를 달라.’ 며칠 전 프랑스에서 한 여성이 죽을 권리를 달라고 요청했다가 그 죽을 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을 감행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있을 수 없는 것은 죽는 일이에요.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 이것이 유전 공학, 유전자 복제 등에서 나타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푸코를 많이 읽는 이유도 푸코가 내놓은 이런 컨셉 때문입니다. 근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군주가 신민을 지배하는 방식과 근대 국가가 국민을 지배하는 것에는 결정적인 단절이 있다. 그게 뭐냐? 그 사회에서 지배받아야 할 사람, 피치자는 무엇으로 다뤄지냐면 추상적으로 생명체로 다뤄진다는 거에요. 너는 지금 어느 정도의 건강상태이냐, 어떤 사회적인 안전 상태 속에 놓여있냐, 목숨, 생명을 가지고 있는 Biological한 삶으로 본다는 거에요. 이것이 국가가 가지고 있는 보건, 복지, 위생, 노동문제 이런 것들이 되었던 중요한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 푸코가 근대 초기의 기독교의 사목권력으로부터 빌려 왔던 문제입니다.
야경국가의 국가 이성
이것들이 얹혀지면서 상승적으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지는데, 근대 국가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야경국가(Police state)입니다. 야경국가가 만들어 놓은 것이 국가 이성(State reason)이라고 하는 건데요. 이 컨셉은 국가가 그 동안 자기 자신이 지배해야 할 대상에 관해서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그런 반면에 이 야경국가의 중대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광범한 정보-아까 말씀드린 인구와 같은- 체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지배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 그러면서 만들어진 유명한 개념이 police에요. 이 police라는 개념은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이 Police는 야경국가가 바뀌면서 남아서 지금은 ‘경찰’로 남아있습니다. 원래 폴리스는 policy, politics 등으로 자기 그런 여러 후손을 만들어 냅니다. 이때의 Police라는 것은 생명과 안전 이런 것을 다루기 위해 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활동을 망라해서 가르키는 말입니다. 야경국가는 그런 틀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어요. 여기로부터 출발한 것이 자유주의입니다. 여러분과 오늘 신자유주의이야기를 할 건데, 그럼 구자유주의는 뭐냐? 구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뭐가 달라서 신자유주의라고 하냐? 오늘 그 이야기를 할 겁니다.
초기자유주의(Anglo-Scottish liberalism)
구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가르는 결정적인 특징은 이론적인 특징으로 나눠서 이야기한다기보다는 간단히 설명을 해보죠. 구 자유주의(Anglo-Scottish liberalism)은 18세기에 발달했던 자유주의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자유, 시민, 권리, 국가, 법 모든 개념을 자유주의주의자들이 만들어 냈죠. 그 사람들의 기본적인 모델은 자기 스스로 내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는 독자적이고, 경계선이 분명히 그어질 수 있는 영역으로서 경제가 있어요. 그 때의 경제는 정치, 경제, 문화의 경제가 아니라, liberty를 가리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최선의 삶의 상태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윤리이기도 해요. 여러분이 아담 스미스를 읽어보거나 초기 경제학자인 퍼거슨의 글을 읽어보면, 이들은 경제학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윤리학자, 정치학자이거든요. 시장을 보호해야하는 이유는 자유를 보호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국가가 있는데, 자유의 원리를 침해하거나 훼손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자유방임주의>로 알고 있는 것처럼 국가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 자유주의가 발전해왔습니다. 이것이 구 자유주의입니다. 그런데 바로 신자유주의가 등장해요. 신자유주의 등장의 결정적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파시즘이나 나치즘으로 대표되는 국가 사회주의가 부상하고, 케인즈로 대표되는 국가 개입주의가 부상하고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느끼게 되었겠죠. 그러면서 큰 변화를 꼽자면 바로 독일에서 전후에서 독일 연방공화국이 등장하고 서독에서 <질서 자유주의 Ordo-liberals>라는 학파를 만듭니다.
독일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s)
Ordo 는 독일어로 질서라고 하는데, 질서 자유주의자들이 만들었던 생각은 뭐냐면, 봐라! 자본주의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맹목적인 법칙이 있고, 자기자신을 독점화하려는 경향이 제국주의적인 경쟁을 낳고 이것이 전쟁을 낳고 이것이 파시즘을 불렀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사람들의 일치된 분석이었어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일치된 분석이었는데, 뚱딴지같이 Ordo-liberals는 바로 독일에 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독일에서의 자유의 결여, 이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들이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크게 다른 점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경우는 경제가 여기에 있고 그 바깥에 다른 사회적 영역이 있었다고 해요. 이 사람들은 경제라는 말을 없애자고 해요. 이것이 저 유명한 <경제질서>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유입니다. 경제는 자연적인 법칙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관점을 펴는 거에요. 따라서 자유가 없었던 이유는 자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사람들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유명한 말이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 가운데 일부가 저널리즘 적인 용어이든, 학술 용어이든, 일상 용어이든간에 Ordo-liberals가 만들어 낸 말이 많아요. 그 중 하나가 <사회정책 Social Policy>입니다. 이 사람들이 사회정책이라는 말을 왜 만들어 냈을까? 바로 자유주의 경제-여기서 말하는 경제는 개인적 자유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또 그것은 뭘까요? 시장경제가 개인적 경쟁에 기반한 사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정책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을 폅니다. 이 밑에서 공부하고 있던 제자들이 그들이 주장 가운데 일부에 반기를 들면서 Ordo-liberals의 사고를 계승한, 이들이 본격 신자유주의자들입니다.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Ordo-liberals와 시카고학파 모두를 뭉뚱그려서 신자유주의라고 불러요.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들은 시카고 학파 사람들인데요. Ordo-liberals가 내놓은 모델은 자유가 숨쉴 수 있는 경쟁을 통해서 최적의 합리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제적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사회가 항상 붙어있어야 하는데, 경제없이 사회없고, 사회없이 경제없다는 거에요.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이 사람들이 도입했던 기본 모델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업 enterprise의 모델이에요. 이 기업, 사업체 모든 것이 사업체화되어야 한다. 공공기관, 가족의 형태도 하나의 사회로 봐야 한다. 이 관점을 시카고 학파는 본격화시킵니다. 이 모든 것이 기업처럼 다루어져야 한다 이런 관점을 채택하죠.
통치성(Governmentality)
이것은 우리가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에서 목격했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제 이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푸코가 신자유주의를 분석할 때 통치성, 정치적 합리성, 정치적 이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푸코가 10년 동안 자유주의를 분석하고, 신자유주의를 해석하기 위해 썼던 전반적인 방법을 요약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치성이라고 부르는 개념화는 Govern이라고 하는 지배하다, 통치하다는 개념과 Mentality 사고양식이라는 것을 결합해서 푸코가 만들어낸 신조어에요. 이 신조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배하는 것은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일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권력이 있으면 그냥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권력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작용될 수 있는 사람도 동시에 만들어 내야해요.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대상을 항상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그런 권력은 없는 거지요. 이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푸코의 유명한 테마 중 하나인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요.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어떤 제도, 기술, 관행, 법률을 사용할 것인가 그것을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서, 사회에 관련된 그림을 만들어 내게 합니다. 이런 사회에 대한 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이 권력이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세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권력은 동시에 외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행위 할 수 있는가 하는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권력은 내가 앉아서 해라 말아라 하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벌어먹고 살아야 할까?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이런 방식으로 개인의 행동의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는 푸코식의 표현을 빌면 행위가 가능하게 하는 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 권력이에요. 자유주의는 그것을 만들어 냅니다. 자율적으로 사는 개인이 있고, 명령과 금지의 형태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형상은 가지고 있지 않고, 눈에 띄지 않으면서,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행위할 것인가 행위의 조건을 만들어 내는 가운데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 세가지를 끌어내면서 푸코가 자유주의를 분석하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이게 원래 통치라고 하는 거버먼트 개념 아래 그것이 들어있었다고 해요.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통치, 정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원래 이 용어가 가지고 있던 기원은 자기를 어떻게 Govern할 것인가, 가족의 삶을 어떻게 Govern할 것인가, 그 다음에 가구를 어떻게 Govern할 것인가? 왕이 군주가 자기 국가를 어떻게 Govern할 것인가. 이렇게 연속된 것이라고 해요. 지금 우리는 다른 종류의 문제라고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연속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Government는 통치/정부와 관련된 것이지, 가정이니 그런 것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그러나 미셀 푸코가 통치성의 개념을 고집한 이유는 이 개념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흔적, 가장 작은 개인적인 삶을 자기 자신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국가가 사회를 어떻게 관리하고 지배할 것인가가 하나의 실에 꿰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Governmentality라는 개념을 고수합니다. 이는 제가 이따가 여러분에게 다시 설명할 신자유주의에서 그런 점들이역력히 들어납니다.
사회적 신체의 지형학(topography of social body)
첫 번째로 이야기했던 것이 푸코의 통치성 개념 우리가 푸코로부터 다시배우려고 하는 푸코의 주장일텐데요, 이것이 푸코가 <사회적 신체의 지형학>이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은 이런 통치성으로서, 정치적 합리성으로서의 신자유주의의 특성이 뭐냐. 이건 한마디로 압축해보면 토마스 렘케(Lemke)라고 하는 독일의 어떤 학자의 말을 따왔는데요 "신자유주의는 사회영역을 경제화하고 (복지) 국가 서비스와 안전 체계를 축소시키는 것과 개인적인 책임 및 자기 돌봄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합리성이다.” 이런 이야기로 요약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신자유주의의 모든 특성을 핵심적으로 함축하는 것일 수 있어요. 그럼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실업 이야기를 해보죠.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실업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사회관리 모델 안에서는 unemployment라든가 the unemployed라고 하는 인구집단이 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무슨 사람이 대신 등장했느냐? 우리는 시장이 없고 모두가 자기가 자기고 있는 고용 가능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IMF니 OECD니 월드 뱅크니, Haverd Business review에서 만들어낸 말이어서요,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상한 말로 바뀌는데 최근에는 <고용 가능성>이라는 말로 바뀝니다. employability에요. 고용되어있는 상태와 고용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문제가 되는 것은 고용가능성을 증대시키면서 끊임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용될 수 있는 능력을 관리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거에요.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고용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에요. 실업률이 높아지면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대두, 국가가 사회의 건강과 안전의 문제와 관련해 등장한 개념이 실업이거든요. 그래서 실업을 관리하려고 했는데, 이제 국가는 실업을 관리할 필요가 없고 각각의 개인의 자기 책임의 문제, Self-care의 문제가 되는 거에요.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이나 회사에 들어가게 되고, 예기치 않게 실업에 직면할 경우에는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지만, 연금이나 다양한 사회적 서비스로 실업상태로부터 보호받게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안그러지요. 그 대표적인 형태가 저 유명한 언어 ‘경력’, 포트폴리오, 커리어 개발, 그게 신자유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사회 모든 영역이 경제화되었다는 말은 취업 5종 패키지를 위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뛰고 있는 대딩들 이 사람들을 가르켜서 신자유주의는 어디에 있느냐? 고용을 줄이려고 하는 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방식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자기를 상상하고 책임지고 돌보고 있는 개인들 안에 신자유주의가 깃들여져 있다는 것이죠. 최근에는 심지어 5종 패키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직장인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죠.
개인적인 책임 및 자기 돌봄
2-3주 전에 본 25-35 한국의 남성 세대를 위한 잡지가 있어요. 요즘 직장인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매주 꼬박 보는데, 그 주에도 특집이 나왔어요. 지금 남자 직장인들이 가장 회사에 바라는 것은? 통계가 나왔거든요. 그 가운데서 60%를 차지해서 1위가 된 것이 회사가 나에게 자기 계발을 보조해줬으면. 자신과 일터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거기에서 짐작할 수 있는 거겠죠. 거기에서 만들어진 것이 옛날에는 빈민으로 지정해서, 영세민 이런 개념이 있었잖습니까? 그 말을 대신해서 만들어진 것이 신용불량자라는 개념입니다. 영세민은 그 사회로부터 배제되어있거나 아니면 그 사회에서 탈락했거나 그런 사람들이겠죠.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그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게 되면서 비롯되었던 병리적 현상으로 다루어 졌었어요. 지금은 그런게 아니죠. 신용불량자가 영세민, 빈민이니 심지어 마르크스조차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자본주의로 인한 가장 큰 변화가운데 하나가 구빈법이다. 구빈법으로 인해 Welfare, 복지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움직였어요. 빈민, 복지, 복지 수혜자 그 다음 신자유주의가 만든 것은 신용불량자에요. 자본주의 안에서 세 개의 모델을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가 구빈법이에요, 두 번째가 복지, 세 번째가 신용불량자에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구빈법과 복지 안에서는 개인적 가난이라는 문제와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질서 안에서 고리가 있었던 데 비해서 지금은 본인들이 자기 스스로 돌봐야 할 문제에요. 어떻게? 알프스 론, 러시 앤 캐시. 받아다 쓰고 카드깡해서 막으면 되죠. 그렇게 자활해야죠.
그 대표적인 프로그램의 하나가 이명박 정권이 어제 내놓은 뉴스타트 2008 프로그램이죠. 거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지도 아니고 구빈도 아니고, 볼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을 돌보는 책임을 가지고,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책임화 시키는 푸코 학자들이 Self responsibilization이라고 부르는데요.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Self care다, 자기 돌봄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이제 시민은 시장 안에서 자기를 돌봐야하는 개인들이라는 거에요. 푸코가 오랫동안 이에 관해 공부하면서 충격을 받은 것 중의 하나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시카고 학파 중(2차 대전 이후 노벨경제학상을 거의 다 휩쓴 것은 시카고학파이긴 하지만요) 재미난 인물 가운데 하나인데요, 게리 벡커 이 사람은 지금 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이에요. Human Capital, 인적 자본 혹은 사회자본이라고도 하는 말이에요. 이학교에도 사회자본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그 선생님들이 공부하시는 사회자본은 부르디외의 사회자본이 아니라 저기 시카고 학파가 이야기하는 사회자본이거든요. 이들이 말하는 인적 자본이 뭐냐면, “이 바보같은 놈들아! 너희가 왜 기업에 고용되어있는 노동자라고 생각하느냐? 천치처럼. 네가 가지고 있는 지식, 네가 가지고 있는 행위의 성향, 창의성, 이런 것들을 밑천 삼아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자본가라고 왜 생각을 못하냐?” 거기에 노동자는 없어요. 자신의 인적 자본을 가지고 기업과 인연을 맺고 있는 유능한 자본가가 등장하는 거죠.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들이죠. 노동자는 없어 이제, 모두가 자신의 인적 자본을 관리하는… 이 모델은 이후에 무엇으로 나타나냐 면(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시카고학파 사람들이 미국의 경제학자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싱가폴을 보라, 한국을 보라.’라는게 한동안 유행했어요. 이 나라가 왜 이렇게 발전하고 있냐? 이 나라는 인적 자본이 풍부하다. 높은 교육열. 아시아의 용들이 왜 나왔겠느냐.
사실 그 이야기는 한국과 동북아지역의 경제발전을 분석하기 위해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시카고 경제학파들이 인적자본론을 한번 띄워볼려고 한 이야기에요. 공공교육은 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왜 그런가 하면 인적자본과 관련해서 7차교육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요, 전체의 국민들이 읽고 쓰는 평균적인 지적능력을 향상시키고, 그것을 사회전체의 성장과 연계시키자. 이것이 <교육과 성장 개발 발전>이었어요. 이것을 연계시키는 것이 교육 정책이었다는 거에요. 지금은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신자유주의의 주된 특징 중 하나가. 이제는 뭐하러 온 국민이 배우고 익히게 도와줘. 그때 문제가 되는 새로운 개념은 <수행성>이에요. 여러분이 바로 <수행성교육>을 받고 성장한 세대가 아닙니까? 그러면서 창의성이 어떻고 막 이런거에요. 그래서 만들어지는 것이 전체 국민이 가지고 있는, 학생집단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구성하고 있는 이론으로서의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나>가 있게 됩니다. 그 각각의 나를 가키는 저 유명한 표현이 <자기주도적학습자>에요. 학교사회로부터 학습사회로 넘어가자. 이런 표현이 등장하는 거에요.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난 수십년 간의 한국의 교육 모델의 결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입시가 판을 치지 않아요?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바꾸자고 만들어 낸 것이 바로 7차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학생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자기주도성을 발휘하도록 하고, 그러면서 훈육 입시사회의 교육 모델을 바꾸자고 해서 막 나와서 바꿔낸 것이 지금의 교육 모델이에요. 하지만 놀랍게도 전보다 훨씬 가혹한 입시교육이죠.
자 또 하나 최근에 복지 개념이 어떻게 바뀌냐. 대표적인 것이 생산적 복지, 능동적 복지라는 개념이에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이 복지 이야기를 할 때 마다 꺼내는 이야기인데, 생산적 복지, 능력적 복지. 미국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복지국가에서 능력개발 국가로.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거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깜찍한 표현을 빌자면 빵을 나눠 주면 안된다, 빵 굽는 법을 알려줘야지. 물고기를 주면 안된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줘야지. 그래가지고 국가로부터 사회로부터 어떤 베네핏이 사람들에게 돌아가면 안되요. 그 인간들이 게을러지고, 마약하고, 일 안하고 그 떄 유명한 표현 그렇게 돈을 쏟아부을 때마다 나타나는 것은 사회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에요. Moral Hazard. 신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잖아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나니까 미국 연방준비은행에서 돈을 좀 쏟아 부으려고 하니까, 모럴 해저드가 나타난다고, 공공기금을 그런 방식으로 주면 안된다고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이 벌떡 일어나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모럴 해저드에요. 능력개발국가, 복지국가에서 능력 개발 국가로 가자 바로 이것도 같은 문제제기입니다. 바로 현재 우리가 지금 받고 있는 다음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 임식직을받고, 교육을 받고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노동교육연구원에서 노무현 정권 당시 만들어낸 희안한 기관이 있습니다. <뉴패러다임 센터>에서 하는 것은 실업자를 위한 광범위한 정책의 변화를 보여주는 활동을 합니다. 바로 컨설팅이에요. 어떤 방식으로, 네가 가지고 있는 경력을 개발할 것인가를 분석해서 세분화된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신자유주의의 주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컨설팅 사업의 번창이에요.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면접을 받기 위해서부터 어떻게 생활을 해야할지도 모든 문제가 개인적 책임의 문제로 가니까 모든 것이 컨설팅의 문제로 매달립니다. 취업할 때도 이력서, 외모관리, 옷 입기 모든 것이 컨설팅이 되요. 컨설팅 업들이 그토록 부상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책임지게 하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문제로 사회를 움직이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거에요.
또 하나가 여성문제같은 경우가 있죠. 남녀 불평등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이 자율적이고, 자기주도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남녀불평등으로부터 문제가 이렇게 이동하게 되었는가? 저는 다른 분들과 의견을 달리할 수 있을텐데요, 그건 제가 한국 여성운동에 대해 실망이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한국 여성운동이 신자유주의와 짝짜꿍이 맞아서 지난 20여년간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거칠게, 심하게 나쁘게 말하면 그렇지 않은가. 대학에 있는 여러 가지 여성 불평등과 관련해 활동하던 기관들이 <여성 리더쉽 센터>로 이름을 바꾸어 가는 양상. 한국사회에서 남녀지위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 특히 여성운동이 만들어 낸 '주류화'이런 프로그램에 따라서 만들어진 전략적 선택이라고 치더라손 우리가 잃었던 것이 무엇인가. 여성을 신자유주의적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한 프로젝트에 여성운동이 참여하는 것은 아닐까? 분석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영 페미니스트 운동이라고 한국 사회에서 맹위를 떨쳤던 운동이 그런 운동이 아니었을까 하는 저는 의구를 적잖이 가지고 있어요. 이 때 볼 수 있는 여성은 가부장제에 의해서 예속 당한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자유를 속박당하는 신자유주의적 여성의 모습을 보는 것이지 거기서의 여성은 가부장제적인 불평 속의 여성일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국가와 관련된 여러가지 형태의 여성과 관련된 프로그램 정책과 제도를 어떻게 볼까. 이 뿐 만이 아니에요.
신자유주의는 병원에도 침투해요. 보건의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의료서비스 시장화된다는 문제도 물론 크지만, 미국과 같은 경우 메디 케어를 각자 개인적으로 구매해야하는 상품 아닙니까? 우리는 그런 의료서비스가 시장화되었다가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보건학이라든가 간호학에서 나오는 저널에 해괴한 글들이 계속 발표되요. 최근에 결핵 환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자기존중감에 관한 연구. 특히 간호학논문의 80%는 그래요.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존중감이라는 거에요. 언제부터 간호학이 그런 것을 다루기 시작했을까? 뭐냐면, 의료서비스 안에서도 환자는 자기 자신을 의료 서비스 안에서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거에요. 과거의 의료모델 안에서 병원 모델 안에서 존재하는 환자의 모습과 다른 새로운 환자의 모습이 등장하는 거에요. 실제로 이 질병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다란 인생 역정이 있고. 제 또래만 해도 인생이 뭐냐. 다 뻔했어요. 학교다니고, 군대갔다가, 일자리 얻고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죠. 지금은 다르잖아요. 여러분들에게는 끊임없는 이벤트의 연속 이런 것 아닙니까? 그걸 원했었고요. 7-80년대에, 특히 90년대에 아빠처럼 살지 않을거야. 그렇게 틀지워진 삶을 살지 않을꺼야. 나는 그런 조직인간으로 살지 않을거야. 나는 그렇게 기계 속의 부품처럼 살지 않을꺼야. 나는 내 삶을 내가 만들고 선택할거야. 그렇게 해서 돌아온 것은 취업 5종 패키지를 위해서 열심히 뛰는 나의 모습이죠. 그것이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역설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반공독재 훈육 규율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민주화를 가로지르는 주요 충동이었어요. 민주화라기보다는 사실상 머리 좀 기르고 다녔으면, 문신 좀 하고 다녔으면, 학교에서 개겨봤으면, 경찰 좀 안 무서워했으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 한국 경제가 직면한 문제,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를 만들어낼 필요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거죠. 자유화 민주화가 지난 20년간 신자유주의 체제로 이행했지만 신자유주의로 보이기는커녕 우리에게는 학생들에게 보다 많은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고, 여성들에게 보다 많은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이고, 이런 것들을 낳게 했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우리가 의료서비스를 잃은 대신 찾는 것은 끊임없는 자유에요. 어떤 자유? 시장에서 AIG 보험을 살까, ING, 교보를 살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거죠. 또 대표적으로 안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죠. 도곡동에 도둑 듭니까? 봉천동, 미아리 이런 데는 도둑이 끓어요. 왜 그럴까? 돈 많은 놈들 안털고, 못털죠. 아까 이야기한 Police 개념. 예전에는 이 security를 관리하는 것이 국가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지금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security를 관리해야해요. 어떻게 하냐? 세콤에 가입해야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세콤에 가입해서 자신의 안전을 구체적으로 책임하고 추구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이러면서 또 번창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변호사이죠. 로스쿨이 왜 들어올까? 왜 한국 정부는 OECD 국가 수준으로 변호사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할까? 이런 것들도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야기를 요약해보겠습니다. 오늘 푸코가 보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을 통치성,정치적 이성, 정치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빌러서, 첫 번째 권력은 자기가 지배할 수 있는 사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을 생산한다. 권력은 지식과 짝을 이루고 있다. 두번째로 권력은 주체와 상관있다. 권력은 지배받는 사람을 만들어 내야 한다. 세 번째로 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강압이나 통제가 아니라 바로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가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를 분석하려고 했던 거에요. 푸코의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행위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 사회에 대한 어떤 그림 만들도록 하고 있고, 여러분이 경험적으로 느끼는 몇가지 사실들, 실업자의 모습을 어떻게 볼까? 빈민이나, 가난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획기적으로 변하고 있나.
제가 싫어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박원순 변호사 같은 분이거든요. 그분은 왜, 사회 공공성을 위해 기여하는 드문 분이 아닙니까? 제가 제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분은-제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아주 많아요~(웃음) 가끔 저도 막 미워해요.(웃음) 문국현은 사실상 노무현 정권 당시에 한국 사회에서 영웅적인 인물로 떠올랐어요. 그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고용이냐 성장이냐하고 할 때 그 해법을 가진 유일한 인물로 보였어요. 한명도 해고하지 않고 4조 2교대인가 해서 노동자를 모두 고용했을 뿐 아니라 생산성도 높였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갖은 감투를 주고 장관으로 입각시키려고 했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대통령 후보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문국현의 유한킴벌리에서 보는 모습이 바로 신자유주의 하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입니다. 제가 보기엔 유한킴벌리 노동자가 제일 불쌍한 것 같아요. 현대자동차 노동자는 퇴근하면 자기 시간을 갖는데 유한킴벌리 노동자는 퇴근하고 나면 회사에서 만들어 준 자기 계발 프로그램에 들어가야해요. 24시간을 그렇게 사는거에요. 그래도 현대차노동자는 5시에 퇴근하면 기업 밖에 놓여있는 사람이지만, 유한킴벌리 노동자는 말 그대로 끊임없이 자기 능력을 계발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최근에 MBO제도 같은 것은 여기에 있는 분 중 직장을 조금이라도 다녀본 분들은 다 알거에요. 최근에 전교제가 끝까지 도입을 반대해서 10년째 실갱이를 벌이는 것인데요, 말그대로 목표설정을 통해 평가하는 거에요. 일한 만큼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보상해주겠다는 거에요. 이 목표평가제라는 것은. 연봉제는 정규직으로부터 비정규직으로 가기 위해 하는 새로운 임금 형태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지만. 연봉제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찜쪄먹는 대표적인 시스템이에요. 뭐냐하면 니가 한 만큼, 니가 선택한 만큼, 니가 니 자유를 발휘한 만큼, 니가 니 자신을 어떻게 대했느냐는 사실로 보상을 해주겠다는 거에요. 그를 위해서는 집합적인 삶의 사실로 착취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너를 어떻게 대했느냐, 네가 네 자신을 어떻게 케어하느냐에 따라 널 평가하겠다는 거에요. 이런 새로운 경제적 보상제도의 도입은 우리가 겪었던 지난 200년간의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거든요. 임금이 단순히 연봉제로 바뀐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죠. 그래서 우리가 할 말이 없는 거에요. 건희 오빠가 1명의 인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 100만명을 먹어살린다고 해도. 우린 다 뭡니까? 우린 다 9만9천9백9십9명의 밥벌레 아녀요. 이때의 인재는 뭘까요? 자기 자신을 끈질기게 돌보는데 성공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친구들이 가지고 있던 인재, 공식적으로는 탤런트, 한국사회에서 인사노무관리로부터 인재개발, 혹은 인적자원 개발로 회사 부서의 명칭이 바뀌었잖아요? 인적 자원개발부, 인적 자원부 조직의 명칭도 다 바뀌었는데, 이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인재라는 개념, 근로자라는 개념을 대신해서 노무자, 직원, 사원 등 한국전쟁 이후에 노동자를 부르던 그 자리를 대신한 인재라는 개념 하에서 여러분이 보는 것은 뭘까요? 엄청난 생활수준을 누리는 인재와 밥버러지의 무능력함. 그때의 무능함은 뭘까요? 이 등신 같은 나. 나는 어째 못나서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할까?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공무원 시험도 보고, 자기개발서도 읽어보고, <20대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런 것도 따라해 보면서 사는 거죠. 자, 문제가 되는 것은, 제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신자유주의에 우리가 맞서 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중요한 지점 가운데 하나는 신자유주의가 낳은 참담한 삶의 결과에 맞서 싸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한다. 왜냐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동원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끔찍한 삶의 체제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에요. 자유를 어떻게 다시 재발명할 것인가?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이 있어요. 마돈나를 한번 생각해봐라. 8-90년대 그녀는 등장했을 때 당시의 가족적 가치, 보수주의적인 가치, 성도덕 그런 것에 맞서 싸우려고 했던 여성 아닙니까? 미국에서 마돈나 학과라는 이름을 만들겠다 할 정도로. 마돈나라는 성녀의 이름을 빌려서 흔히 보는 매춘부와 똑 같은 모습을 하고 무대에 등장해서 저는 돈밖에 모르는 나쁜 년이에요라는 노래를 부르고. 그런 그녀가 최근 어떤 삶을 살까? 세상에서 계율이 가장 엄격하다는 카발라교에 귀의했잖아요. 심지어는 동화작가로 데뷔했어요. 왜 그녀는 그렇게 되었을까? 저는 이해가 가요. 사실상 그녀가 그 때 외쳤던 자유로운 삶을 되찾자는 모습은 지금 미국의 금융가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쟤랑 나랑 같은 모습이다. 얼마나 환멸감을 느끼겠어요. 그녀는 그에 대한 반동 가운데 하나가, 미국에서 유행하는 것 중 하나가 프리섹스가 아니라 평생 순결을 맹세하겠다는 것이 가장 쿨한 것이라잖아요. 그래서 다시 금욕적인 삶의 계율 속으로 들어가진 말아야겠죠.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가 남용되고 있다는, 자유를 통한 착취가 우리가 사는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 핵심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이 사회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 그에 관한 상상력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으로 제 강의는 모두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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